우물 안 개구리

7/16/2006

Kim Hwanp’yo and his “Ssalpap chŏnchaeng”

Filed under: — noja @ 9:03 am Print

Several days ago, I was happy to be presented a newly published book by the publishers who had also earlier printed two of my own books – that is, by Seoul-based Inmul kwa sasang (인물과 사상). The book is entitled “Ssalpap chŏnchaeng” (쌀밥 전쟁: “War for rice”, or how should I translate it?), and written by certain Kim Hwanp’yo – a non-academic, obviously from the circle of Prof. Kang Junman (a Chŏnbuk University media scholar and famous social ciritic, well-known for his habit to “name names” while criticising people and institutions – a dangerous thing to do in our position, I would add…), who previously co-authored several essay collections of political and “cultural criticism” including one on the history of S. Korea’s official ‘anti-communism.’

This new work, a surprisingly detailed and professionally written account for somebody who is seemingly neither a historian nor a specialist in the field of agricultural economy, deals with the story of S. Korean rice agriculture, and mainly in 1960s-70s. The picture which emerges from reading it is helpful in understanding what is going on in North Korea in a sort of wider historical perspective—you get to know that S. Korea achieved self-sufficiency in rice in 1976, when it harvested 36 million sŏk of rice, and that this achievement was, in fact, quite shaky. S. Korea had to resume rice imports in 1980, when it harvested only 24 million sŏk due to a large-scale crop failure. It was happy enough to do so as it had enough currency at the time, and then became a stable client of the Californian rice cultivators – who were politically well-backed enough to press Chŏn’s dictatorship to buy their wares throughout the early 1980s, even when S.Korea did not really need them.

N. Korea, with its depleted foreign exchange reserves and without cheap Soviet fuel and fertilizer, did not manage in the mid-1990s to escape the same plight which Southerners barely escaped in 1980. The way to rice self-sufficiency under Park was a bumpy one, and involved lots of disciplinary action taken in a good Japanese imperial spirit—of the kind the Western public would probably more readily associate with North Korea. It included designating special “no-rice days” (무미일 – no rice to be sold anywhere, and presumably no rice to be eaten in home dining-rooms, although this part probably was not really well-enforced), ordering in 1963 that all rice merchants to blend 20% non-rice cereals (잡곡) into their wares, and ordering restaurant owners to do the same with the rice they served. More resembling the good old imperial days—as well as the realities of the North Korean situation—were housewifes’ “public meetings for the sake of encouraging flour-based meals” (분식권장궐기대회), which were supposed to force home kitchens to comply with the governmental policy of “분식의 날”—bread and noodles only, none of that luxury good called ‘white rice.’ These housewives who were deplorably ignorant about the ways of making good food without rice, were taught to do so in special “flour-based meal consultation centres” (분식상담소), run from 10.00 to 16.00 every weekday by the “National Reconstruction Movement” (재건국민운동본부). And they had to study assiduously. If the share of white rice in the lunch boxes of their children exceeded prescribed norm, and this heinous crime was uncovered during the regular “lunch box checks” (도시락 검사), the punishment (that is, the corporal punishment for the children) would be severe, and their children’s grades for behaviour might suffer.

This “rice economizing movement” (절미운동) ended only in the late 1970s—and the age in which newspapers explained that the high intelligence of Westerners was precisely thanks to the fact that they ate bread and not rice, became just an (unwelcome) part of the collective memory. It all shows something about the nature of post-colonial statehood on the Korean Peninsula – but the Western media did not try that much to poke fun at Park Chung Hee’s ways to discipline and punish his subjects, while very similar things (on a much worse scale, I have to acknowledge) done by Kim Il Sung, were always mocked in very good humour, were they not? I always wonder what proportion of Western—and non-Western—consumers of Samsung products are aware of what would happen to any Samsung employee who tried to unionize his/her company?

전시소개: 잊혀진 제국/헤르만 산더의 여행

Filed under: — Gyewon @ 8:14 am Print

안녕하세요? 갑작스런 비에 다들 무사하신지… 이번에는 한국어로 포스팅하겠습니다. 다들 한국어 실력이 워낙 출중하신지라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만.

지금 서울에서는 재미있는 사진전들이 개최되고 있습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1. 잊혀진 제국: 서울대학교 박물관

2. 헤르만 산더의 여행: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정보는 링크를 참고하시고요.

“잊혀진 제국” 전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의 사진 도큐먼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학예연구원 선 일씨가 야심차게 준비하신 기획전입니다. 박물관 소장품 중, 황실 관련 사진첩들을 전시로 재구성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 전시의 미덕은 무엇보다, 그 정보성에 있습니다. 즉, 황실의 살림살이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전시의 구성은 제법 아기자기 합니다. 사진들을 여러가지 사건/내러티브들로 풀어 헤쳐놓았어요. 즉, 단순히 300여점의 소장사진을 기계적으로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학예연구사의 노력이 보인다는 것이지요.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노력의 결과가 전시의 형태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시는 일회적이지요. 그것이 전시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한계이기도 합니다. “잊혀진 제국”같은 정보적인 전시는 그 일회성을 분명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전의 도록은 어쩌면 전시 자체보다 더욱 중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전시가 끝나면 사진은 다시 수장고로 들어갈테지만 도록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역사전을 치루기 위해서 학예연구사는 사진의 고고학적 연구에서 시작하여(저자, 년도, 장소, 기타 등등), 사진의 컨텍스트 (역사적 공간/사건)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셔야 합니다. 그 뿐입니까. 역사가들 또한 연구를 해주시고 글을 써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전이란 역사에 대해서, 역사와 사진의 관계에 대해서, 역사의 구성과 사진의 기록성에 대해서 메타비평하는 장에 다름아닙니다. 전시는 그것을 시공간적으로 보여주는 기술이라면, 도록은 그 기술의 단면적 저장고 입니다. 역사전에 도록이 푸짐하게 나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관계자 분들께서 이 점을 모르고 계시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늘 그렇지만 주어진 여건이 문제겠지요. 학예연구사 선 일씨의 연구 내용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조선에 건너와 찍었던 인류학/무속학/민속학 사진들입니다. 서울대 고미술사학과에서 공부하셨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논문 검색을 해보시길. 

사족: 제 경우, “잊혀진 제국”전은, 알렉산더 소쿠로프(이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_-;;)의 The Sun 이라는 영화를 연상시키더군요. 일본에서 상영금지되었다가 얼마전 해제되었다죠. 히로히토 천왕의 살림살이에 관한 영화입니다.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벽지가 동일해요. 조선의 마지막 황실과, 히로히토네 살림살이의 벽지가요. 그리고 그것은 또한, 제 기억에 따르면 동경국립박물관의 벽지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우연일까요. 이렇게 제국은 어떤 특정한 시각성과 시각적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지요.(아,, 벽지 자체를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가 궁금하신 분들은 여길 따라가 보시길. 

 

“헤르만 산더의 여행” 전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오랜만에 내놓는 사진전입니다. “잊혀진 제국”전이 황실의 살림살이를 공개하는 전시라 한다면, “헤르만 산더의 여행”전은 외국인의 시선이 그려낸 조선의 풍경을 소개해주는 전시라고나 할까요. 헤르만 산더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유품들을 기증하고, 그것을 국박에서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따라서 “잊혀진 제국”에 비하면, 사진을 촬영한 주체가 아주 분명하고요. 또한, 사진과 기록이 병행되었기 때문에, 산더의 촬영 목적 또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점들은 사진의 해석을 더욱 더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사진을 통해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해지고요. 어쩌면 이 전시의 도록이 좋은 글들과 도판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몰라요. 여러분의 필자들이 글을 써주셨습니다. 저는 이경민 선생님의 글을 추천하고 싶어요. (더불어, 이경민 선생님의 저서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입니다) 전시에 대해서 따로 말씀드릴 부분은 그다지 없습니다. 역시 정보적이고요. 역사의 디테일을 한껏 제공해줍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줏어담기 힘들 정도로요.

+ 다만, 제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서양인의 조선에 대한 타자적 시선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차용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양인이 구한말에 재현한 조선의 풍경과, 일제 강점기에 재현된 조선의 풍경은 도상학적으로 아주 많이 겹쳐져요. 그렇다면 서양인의 일본에 대한 시선은요? 이를테면 비아토가 찍은 요코하마 사진 같은 것들이요. 제가 보기엔, 이 또한 서양인/일본인이 찍은 조선의 풍경사진과 교집합을 가지고 있어요. 도상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요. 전시 도록에서 필자 누군가가 이런 부분을 짚어주었다면 좋았을텐데요. 

+ 점점 더 이런 전시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유물을 아카이브즈/박물관에 기증하고 학예연구사들이 대중에게 전시의 형태로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요. 사진 아카이브즈가 부재하기에(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전시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 이렇게라도 보지 않는 다면 그냥 땅에 묻히는 것이죠.

+ 역사전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은, 매번 동일하지만, 과연 100년전에 카메라로 기록/재현된 이미지로 그 당시를 감각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할 수있을까요. 사진은 역사를, 역사는 사진을 구성할 수 있을까요. 롤랑 바르트는 은근슬쩍 그렇다고 대답하였지요. “같은 세기가 사진과 역사를 발명했다”고요. 발명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지요. 다만 발명의 정치가 문제인 것이지요.

다들 이 무거운 비에 무사하시길요. 사실 저는 내일까지 써야할 무언가가 있는데요. 꼭 데드라인 전에는 딴 걸 하고 싶어진다니까요. 그래서 얼떨결에 포스팅도 하게 되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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