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리움미술관 기행기

나의 리움미술관 기행기

명색이 미술사학도이지만, 솔직히 말해 미술관 기행이 별 재미가 없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거기에 켜켜이 쌓여있는 아우라의 무게에 짓눌려 재미가 없다.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은 오랫동안 제도 밖에 머물어 가난하고 빈곤하다. 그렇게 제도의 힘은 강력하다. 특히 미술관이라는 제도란, 그 미학적 효과 때문에 더욱 더 강력하면서도 탈정치적이다. 예쁘다 라는 형용사가 가진 위력은 생각보다 크다. 금자씨(영화)에 등장하는 예뻐야 돼 라는 대사는, 그래서 더욱 더 무섭다. 우리는 그 예쁨의 전후면을 삐딱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입장료 1만 5천원,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시 1만 2천원. 미술관 예약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 세계적인 건축가 세 명(마리오 보타, 장 누벨, 램스 쿨하스)에 의해 완공된 세 개의 독립적인 전시 공간, 삼성(이라기보다는 삼성 회장 부인의 개인) 소장품, 그리고 이태원이라는 공간.

충분히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요소들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리움미술관에서는 작년 12월, 세계적인 아티스트 매튜 바니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크라이매스터 씨리즈의 다수가 전시되거나 상영되고 있었으며, 다국적 기업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크라이매스터 최신작 또한 상영되고 있었다. 상설관은 삼성가의 소장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양관/한국관이 아닌, 현대관/근대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국 미술품들은(물론 한국 미술품이라는 개념 또한 정의하기 힘들지만) 시기별로 분류되어, 대략 일제 강점기 이후의 미술품들은 현대관으로, 흔히 청자/백자로 대표되는 근대이전의 미술/공예품들은 근대관에서 전시되었다. 오늘날 국제비엔날레에 출품되고, 국제적 네임밸류가 있는 미술가(이를 테면 백남준 등)의 작품은 개념적으로 한국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근대관이 아닌 현대관에서, 동시대 외국 작가들의 작품 (이를 테면 요셉 보이스 등)과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리움은 미술품의 국가적 분류라는 근대적 전시체계를 고수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움의 현대관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중학교 미술교과서의 집대성 이다. 내가 이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중 3때 17년간 모의고사(고등학교 입학용 입시 서적)에 미술과목이 포함되어, 진짜 열심히 미술책에 있는 작품들을 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지 미술사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중등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리움에서 자신이 교과서에서 보고 들었던 유명한 작품들을 연대기순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삼성가는 거액을 투자하여, 입시에 나올법한 서양미술사의 거작과 근현대 한국 유명작가들의 작품들을 수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미술 교과서의 수준이란 지극히 일반적이다. 리움의 수집 경향은, 따라서 일반적인 미술사의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저 안전하게, 미술책에 나열된 이러저러한 유명작들을 착실히 사서 모았을 뿐이다. 이러한 착실한 취미생활은 건축가 장 누벨의 뛰어난 실내/외 디자인에 의해 다른 차원의 종합 예술로 탈바꿈된다. 삼성의 뛰어난 재력, 훌륭한 기획력, 미(美)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전시 공간에서 종합 예술로서 막을 올릴 때, 그 때 관객의 입에서 나오는 탄성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많은 미술사가들이 MoMA의 탈정치적 전시 의도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고, 많은 아티스트들이 서양 제도권 미술에 저항해왔다. 그러나 MoMA의 기획력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위험한 것이라 비평가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리움의 경우는 어떠한가. 현대관에 어떠한 기획이 담겨있다면, 그것은 장 누벨을 데리고 와서 미술관을 건립할 수 있었던 삼성의 재력과, 중학교 수준의 미술사 장르 인식이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1만원이 넘는 입장료는, 남의 취미생활을 감상하는 대가로서 지나치고, 사전 예약제도는 그래서 더욱 더 비관행적이다. 남의 취미생활을 구경하는데 사전 예약을 해야하다니, 나폴레옹이 원정대를 이끌고 다니며 중동에서 휩쓸어 온 보물들을 구경하는데에도(루브르 미술관) 사전 예약따위는 하지 않는다.

리움의 근대관은 어떠한가.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한번도 한국미술품이 이렇게 예쁘고 멋지게 전시된 것을 구경해 본 적이 없다. 만약 몬트리올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료가 한국에 잠시 다녀온다면, 혹은 나의 지도교수가 한국에 잠시 오신다면, 그들이 한국의 미술관을 순례하고 싶으시다면, 나는 리움을 추천하는데에 1초도 서성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는 청자와 백자가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품이었는지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청자/백자 자체가 달라졌다기보다, 리움이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주 훌륭했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기존 박물관에서 청자/백자를 전시하는 방법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리움의 전시방법은 더욱 더 빛이 났다. 국공립 미술/박물관이 가난한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그들의 전시방법이 아무런 미학적 고민도 질문도 효과도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더 빈곤했다. 그런데 리움의 근대관에서 청자/백자는 다시 태어난다 깜깜한 실내에 한줄 오롯이 들어오는 조명과, 그 조명이 가리키는 곳에 조그맣게 빛을 발하는 한국의 자기들. 코너를 돌며 내려올 때마다 경탄은 더해간다. 한국의 미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무언가 한국의 특수한 미적 경험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 되새겨 볼 정도로, 리움이 보여주는 미술품들은 아름다웠다. 현대관에서 보여준 중학교 미술책 수집방식은 근대관에서도 계속된다. 삼성가는 심지어 신라시대 탑도 소장하고 있다. 그것도 금탑을. 삼성가는 심지어 사극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월도 (주로 임금 옥좌 뒤에 나오는 병풍)도 소장하고 있었다. 고려미술의 찬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반가상들은 리움에서 너무도 엄숙했고 종교적이었다. 이 모든 디스플레이의 기술은, 그간의 국공립 미술/박물관에서는 부재하던 것이었다. 한국미술이 이렇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차원이 아니라, 한 사기업의 차원에서, 그것도 삼성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했다는 사실 또한 무척이나 놀라운 발견이었다. 결국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청자/백자의 아름다움을 뒤로 하며, 탄식성 질문을 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돈이 많아?

리움에 감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 많은 돈을 쏟아부워, 국립 미술제도에서 하지 않은/못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은 상업화된 미술의 대안의 하나로,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공공미술은 무엇인가. 단지 사적 공간 외에서 보여지고 감상되는 미술인가. 그렇다면 공공미술의 태반은 쓰레기만도 못하다. 한국 대기업 빌딩 앞에는 동/구리로 만들어진 기묘한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그 조형물들의 대다수는 미적 질문을 던져준다기보다 차라리 시각적 오염에 일조한다. 게다가 그 목적이 기업의 세금감면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음흉하다. 나는 공공미술의 영역뿐 아니라 그 개념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미술관과 박물관을 건립하고, 재미있는 전시를 열고, 좋은 작품을 소장하여 작가를 지원해주고, 동시에 좀 더 폭넓은 미적 경험의 기회를 주는, 그러한 제도의 문제까지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미술관은 늘 가난하고, 학예연구원들은 외국전시를 들여오는데에 급급해야하며, 작가들은 늘상 굶주린다. 고작 청자/백자에 멋지게 조명 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국공립 미술관에서 가능해지려면 아마도 국가의 행정체계 자체를 포맷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동안 이미 삼성은 기업이 아니라 제국이 될 것이다. 리움이 미술관의 모범/전형/규율, 그리고 권력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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